올해 초에 LA에 갔을 때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었는데 그 때 산 것 같다. 유명한 책이라서 골랐는데 사면서도 '과연 이걸 읽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요즘 새로운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잘 되지 않아서 (이 글도 잘 쓰려고 하면 결국 못 쓸 것 같아서 아무렇게나라도 우선 쓰기로 하고 앉아서 쓰고 있다) 즐겨 읽는 가벼운 소설 몇 권만 계속 읽고 새로운 책은 도저히 못 읽고 있었다. (그 때 중고서점에 갔을 때 산 고전 같은 유명한 독일 작가의 책이 있는데 항상 몇 장 못 읽고 잠들어서 몇 개월째 침대 옆에 있다)


책장에 <발로 차고 싶은 등짝>을 꽂아놓으면서 다음 읽을 책을 고르다가 이 책을 골랐다. 과연 몇 개월에 걸쳐 읽게 될지, 중간에 포기하게 될지, 읽다가 버리지는 않을지 모르는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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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읽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은 '이게 현대 문학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욕이 난무한다. '개새끼'가 나왔을 때는 조금 당황했다. '이거 계속 읽어도 되는건가?'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나오는 욕을 보면서 나는 이게 영어로 B로 시작하는건지, M으로 시작하는건지, S로 시작하는건지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영어로 다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거의 막판에 나오는 여동생 피비의 학교와 박물관에서 보는 욕-*하자-은 영어로는 전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건 'Let's f***'이었는데 실제로는 'F*** you'였다. (독후감을 쓰는데 욕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하게 쓰게 될 줄이야)


1판이 85년에 발행되서 그런걸까? <호밀밭의 파수꾼>은 당시의 은어slang을 알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는데, 우리나라의 85년의 은어로는 그 단어가 맞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는 아무도 그런 욕을 안 쓴다) 지금 번역했다면 '*까' 정도가 가장 찰지고 적절한 번역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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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주위 사람들 다 싫어하면서 계속 욕을 남발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대체 하버드 다니는 놈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걸 읽은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체 이게 왜 뛰어난 작품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 책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고 있었다.


물론 빠른 속도라함은 몇 시간 만에 이 책 한 권을 모두 읽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여유가 없다) 책을 편 지 일주일도 안 되서 모두 읽었다는 것이다.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자기 전에, 일어나서 출근하기 전에 틈틈이 계속 손이 갔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흡입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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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시간은 굉장히 울적해졌던 것 같다. 난 내가 읽는 것이나 보는 것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편이라 홀든이 화내거나 우울해할 때마다 나도 화가 나고 우울해졌다. 


싸움도 못하면서 말로 싸움을 걸고 주위 사람들을 역겨워하고 싫어하는 홀든은 밉지 않았다. 모리스와 서니가 떠나고 나서 복부에 총을 맞은 듯이 또라이짓을 하는 홀든도 부끄럽지 않았다. 나도 분노하면서도 겁쟁이고, 열정적으로 사람들을 싫어하고 술도 안마셨으면서 취한 척 또라이짓을 해본 적이 있으니까. 그래서 조금은 주관적으로 홀든 편을 들어주며 책을 읽었다.


그런 홀든이 어딘가 잘못된게 아닐까, 홀든이 틀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건 루스에게 무례한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을 때다. '아, 선을 넘었다. 선을 넘는구나.' 가장 객관적이고 깨끗한 척하며 어른처럼 굴던 홀든이 어린애처럼 보였다.


그 후로도 홀든이 돌봄caring이 필요한 아이처럼 느껴진 대목이 서너군데 있었다. 피비를 보기 위해 집에 들렀다가 나갈 때도 그랬다. 


웬일인지 모르지만 나갈 때가 들어올 때보다 더 쉬웠다. 이제 붙잡힌다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붙잡을 테면 붙잡으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붙잡아주기를 바랄 정도였다. - p.266


홀든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앤톨리니 선생이 홀든에게 하는 말들을 읽으면서 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나도 들을 필요가 있던 이야기들이라 고마웠다. 그 선생은 술을 마시면서도 꽤나 진지하고 날카롭게 필요한 조언들을 해줬다.


무엇보다도 네가 인간 행위에 대해 당황하고 놀라고 염증을 느낀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그런 점에서 너는 혼자가 아니야. ...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네가 현재 겪는 것과 똑같은 고민을 한 사람은 수없이 많아.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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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오는 며칠의 기간 동안 홀든은 자주 울적해하고 몇번이나 울 뻔 한다. 그러다가 피비가 자신의 크리스마스 용돈 모두를 내어줄 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그 때 나도 모르게 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에게는 홀든이 신경질적인 예민함과 호불호의 끝장으로 마음을 단단히 잠그고 보호하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그렇게 하기에. 


하지만 가끔 사람들의 진심이,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예술이나 자연의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뚫고 들어와 나의 견고한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마음 깊이 있는 위로가 필요한 어린 아이의-나의-손을 잡을 때가 있다. 그런 때에는-이 책에 자주 나오는 표현대로-손을 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참아 왔던, 모아 왔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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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홀든에게 공감할 수 있었기에, 홀든이 겪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기에 나는 이 소설이 왜 좋은 소설인지 알 수 있었다. ('현대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에 공감한다'라고 쓰기에는 나는 현대 문학을 그다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재밌었다. 이게 중요하다. 난 이 책이 재밌었다. 영어로도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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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다리


1. <위대한 개츠비>도 지금 읽으면 재밌을지 모른다.


2. 처음으로 뉴욕에 가보고 싶어졌다. 홀든이 걸었던 곳들을 보고 싶어졌다.


3. <Into the Wild>가 생각났다.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사람들에게 염증과 역겨움을 느껴서 알래스카로 떠나버린 Christopher. 피비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혼자 떠나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




4. 너무 우울해져 버릴까봐 좀 빠져들면 일부러 책을 덮고 비긴어게인 에피소드를 하나 보면서 기분전환을 했다. 그러다가 박정현 공연을 보면서 운 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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